일상의 미메시스적 충동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2019
“아시잖아요?”
작업 이야기를 꺼내며 조현익은 곧잘 이렇게 추임새를 넣고는 한다. 모두 알고 있지 않으냐고. 사랑에 빠지고 실연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일, 이런 경험은 누구나 어느 정도 겪고 지나가지 않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는 자신의 삶으로 작업을 한다. 단순히 ‘삶을 통해서’ 소재를 얻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예술 활동은 삶에서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곧 작품의 원천이자 목적이자 방법이다.
조현익은 지난해 자신의 ‘화업 15년’을 정리하는 준(準) 회고전 《Metamorphosis》(PS333, 2018.7.1~7.15)를 열었다. 그간 그의 작업을 꾸준히 보아왔는데도, 이 전시를 둘러보면서 나는 그의 작업 폭이 넓고 변모가 다채로워서 새삼 놀랐다. 어느 한 편에서는 극단적인 사랑의 가학/피학적 단면을 포착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시선을 따라가고 있는데 그 간극이 커서 이 작업이 모두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맞을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작가가 지나왔을 청년기의 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여러 작품은 과연 ‘변신’이라는 전시명에 걸맞게 다양하게 형태를 바꾸어 왔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 속에서 꾸준히 발견되는 특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미메시스적 충동’과 ‘일상의 제의’이다.
파토스적 체험에서부터 출발하는 그의 작업은 쉽게 마주치는 일상적 기호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 그것이 때로는 여인의 모습으로, 국화꽃 송이로, 관광지의 기념품이나 어린이의 장난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대상에는 어쩔 수 없이 속세에 속하는 사물이 지닌 보잘것없음과 작가의 사적인 감정이 잔뜩 반영되어 ‘선택된’ 우상으로서의 아우라가 혼재하여 있다. 작가는 이를 두고 “종교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세속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중 진정으로 의미 있는 대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작업한다고 정리한다.1)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작업에는 성(聖)과 속(俗)의 특성이 함께 발견되는데, 이 둘은 서로 대결 구도를 빚으며 상대를 배척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존재가 지닌 양가적 속성으로서 동시에 발현된다.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합리성의 논리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광고 전단지 따위가 조현익의 작업에서는 신성한 제물로써 탈바꿈하곤 하는데, 대상에 대한 부정(‘하찮음’)과 인정(‘특별함’)이 상충하며 거울처럼 서로를 비춘다. 하나의 의미에 고정되기보다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치의 전환 속에서 그의 작업은 의미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도르노(T. W. Adorno) 식으로 말한다면, 대상의 파악을 목표로 하는 동일성의 사유와 대상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특징으로 하는 미메시스적 충동이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에 스스로를 동화시켜 나가는 과정인 미메시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주변 세계에 순응하며 이와 유사해지려고 만든다. 보이지 않는 힘, 원초적이고 분화되지 않은 것, 실로 막강한 자연은 인간의 연약한 영혼 속에서 되울림을 얻으며, 익숙하지 않은 것을 경험할 때 나오는 전율(Schauer)은 마법과 주술의 이름으로써 두려움을 성스러움으로 전환시켜 붙들어 맨다.2) 이것이 제의(祭儀)의 기원이라면, 조현익의 작업에서는 다름 아니라 일상이 곧 주술적이고 제의적 행위-그의 경우, 예술작품에 해당하는-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이다.
돌이켜 보건대, 실제로도 그의 작업과 전시는 유독 제단(祭壇)을 세우는 형식으로 수렴되고는 하였다. 가령, 비교적 초기 작업인 《빛, 나를 베다》(가나인사아트센터, 2010.10.13~10.18) 전시의 초입에서는 마치 성모 마리아상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나체의 여인이 촛불에 둘러싸여 있는 그림으로 관객을 맞이하고, 작품 〈King Power〉(2012)에서는 아예 불상을 가져다 놓고 여인상과 대조를 이루게끔 하였다. 또한 《빛의 사원》(관훈갤러리, 2013.4.3~4.27)에서는 전시 자체를 ‘사원(寺院)’이라고 명명하는가 하면, 금박으로 번쩍이는 〈믿음의 도리〉(2016) 연작에서부터는 자신의 아이와 가족이 기원의 대상으로 등극하고 있다. 우선은 본인에게 격정적이고 그만큼 낯선 감정, 즉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면, 최근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낯선 환경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더불어 제단의 형태도 회화의 평면에서 점차 입체적으로 공간을 점유하게 되는데, 과거에는 촛불과 같이 종교적 클리셰를 지닌 사물로 제단을 암시하였다면 요즘 작업은 그런 고정관념마저도 벗어내고 아이의 장난감이나 물약 병, 밥그릇 등 실생활에 사용하던 물건을 쌓아 탑을 세운다. 혹자에게는 “저런 것도 작업이 되나?” 싶을 정도로 변변찮은 일상용품들이 작품에 사용되는데,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작업이 삶과 밀착되면 밀착될수록 예술의 기원이나 예술의 일반론을 환기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잘 알다시피” 어린아이들은 돌멩이 몇 개로도 사람을 흉내 내며 ‘엄마 아빠’ 놀이를 하거나, 두 팔을 벌리고 입술로는 ‘부우웅~’ 낮은 소리를 내며 사물인 비행기를 몸으로 따라 한다.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로도 이야기를 만들고 닮은 꼴을 발견하는 아이들의 시선은 인간과 세계,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근원적인 상태를 가늠해보게끔 한다. 형상과 기호로 분화되지 않고, 목적과 수단으로 행위가 나누어지지 않은 천진난만함은 모방할 수 없는 대상을 모방하고, 이런 무의도적 미메시스는 사물의 진리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 본능을 비추어 보인다. 마법에서 분화되기 이전의 예술 원형을 놀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조현익은 이를 육아를 통하여 간접 체험한다. 그러면서 그의 작업도 아이의 시선을 좇아가며 순수한 미메시스적 충동에 더욱 근접해 간다. 그의 최근 전시 《가족사진》(리각미술관, 2018.4.3~5.15)이나 《육아 일기》(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18.9.6~9.19)만 하더라도 어찌 보면 노골적이며 유치한 제목이지만, 이 꾸밈없는 ‘유치함’이야말로 오히려 선언적이고 도발적으로 보인다. 짐짓 세련된 척하거나 어설픈 개념으로 포장하려 들지 않는 대신, 일상과 예술을 분리하여 사유하는 우리의 인식 체계의 ‘체계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가? 적어도 겉만 번지르르한 이론과 상품성은 아닐 것이다.
사물의 물신화와 도구적 합리성의 폐단을 목도하던 20세기 초,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의 징표가 혼란이라면, 나는 그 혼란의 저변에서 사물, 말, 이념과 그것들을 나타내는 기호들 사이에서 어떤 단절감을 느낀다. …… 우리의 삶에 유황과 같은 정열이 결여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에 항구적인 마술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단순히 바라보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이다.”3)
무수히 많은 예술 작품이 삶에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비평의 시선은 이를 냉혹하게 판단하고 피라미드식으로 우열을 가려서 줄 세우는 동안, 우리는 예술의 마법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의 구체성에 기반한 조현익의 작업은 그러하기에 차라리 이 시대에 보기 드문 행보이다. 애써 멋 부리지 않는 담백함은 일상에서 분리된 예술을 다시 삶과 화해시키고, 예술의 마술성을 회복하려는 소박한 시도이다. 그 역시 이미 사회적 규범과 고정관념에 젖어 성장한 어른이기에 갈팡질팡 길을 찾기 쉽지 않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시행착오를 더 많이 겪을 수도 있다. 그가 아무리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본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른이 아이의 관점을 ‘연구’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 그가 구상하는 신작 제목도 〈조형(이미지) 연구〉이다. 하지만 그의 연구가 일상의 요소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마침내 삶과 동화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독창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흔히 알려진 일화로 피카소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라고 한다. 체계적인 사고와 관습, 고착화된 규율에서 벗어나 진정한 예술의 원형을 어린아이의 엉뚱한 상상력에서 찾은 것이리라. 지금 당장 조현익의 작업이 피카소만큼 훌륭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시류에 휘둘리지 않고 창조성의 근원을 찾아가는 그의 태도만큼은 눈여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토록 삶에 푹 빠져 작업을 하는 한, 십 년 후이든 이십 년 후이든 다가올 그의 회고전은 분명 지금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 2018-2019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 공동워크숍 일환으로 집필된 글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조현익 작가 노트, 2018
-
T. W. 아도르노, 『미학이론』, 홍승용 옮김(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5) & T. W. 아도르노, M.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1)
-
앙토냉 아르토, 『잔혹연극론』, 박형섭 옮김(서울: 현대미학사, 200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알림: 다음과 같이 구분함
작품명: 〈〉 홑꺽쇠표
전시명: 《》 겹꺽쇠표
도서명: 『』 겹낫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