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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OCI미술관 박그림×조현익 《잘 살고 있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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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연 (OCI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2024

 

[전시 서문] 

사회에는 여러 형태의 강압이 존재한다. 권력과 제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분법적 사고와 혹백논리는 인생의 스펙트럼을 아우르지 못한다. 나의 신념에 따라 ‘잘’ 살고 있을 뿐인데 고착화된 기준에 의해 무해한 죄인이 될 때가 있다. 매몰되지 않고 갈 길 가려 마음을 다잡지만 때로는 굳건하던 신념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목표가 흐려져 불안할 때, 어딘가 기대고 싶은 순간 우리는 기도한다. 일반적으로는 초자연적 영역의 전지전능한 대상에 간절함을 보낸다. 상황을 실제로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기도는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와 안정을 낳는다. 역경을 타개하는 것은 그 믿음으로 추진력을 얻어 다시 일어나는 우리 자신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잘 살고 있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도 하며》는 조현익의 2016년 작가노트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어느 날 '믿음의 도리'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포교용 전단을 받은 작가는 '믿음'과 '도리'라는 단어가 갖는 '책임과 강제', '포용과 폭력'의 상반된 개념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믿음이 없는 자, 혹은 도리를 다 하지 못한 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에서 작가는 어떤 믿음과 도리를 따라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했다.

 

우리는 박그림과 조현익의 작품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엿볼 수 있다.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내면의 혼란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 '나'와 '나의 선택'임을 깨달은 두 작가는 창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선택에 대한 믿음을 선명히 하고 있다. 불화 형식을 차용하는 박그림, 제단과 의식, 기독교의 성화 형식을 가져오는 조현익은 분명 종교화의 형태를 빌리고 있지만 특정 종교의 이념이나 교리를 지엽적으로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사회 속 종교가 갖는 기능과 역할, 태도 자체를 창작에 접목한다.

 

결국 두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은 그들에게 창작은 수행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넓은 세상의 수많은 인생 중 하나뿐인 나의 삶을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방법 아닐까. 다양성에 대한 용인의 역치를 넓혀 주는 것이 미술의 주요한 역할임을 상기해 볼 때, 두 작가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의 삶과 자유, 선택의 권리, 사회의 다원화를 인정하는 태도를 일깨운다.


박그림 - 미술로 퀴어 정체성 드러내기

 

박그림은 퀴어 아티스트로서 성소수자의 정체성과 문화를 불화 형식에 녹여낸다. 타인에 의해 비주류, 소수로 분류되며 스스로를 숨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노출되었던 작가는 나와 세상 간의 관계에서 발생한 인연 혹은 상처, 그리고 그 속에서 얻어낸 깨달음의 과정을 창작의 결과물로 치환한다.


대상에 대한 아름답고 치밀한 묘사 

 

작품의 표현 기법이 우선적으로 우리의 눈을 매료한다.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용납하지 않는 정교한 필선, 숨이 막힐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붓의 놀림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그리기 기술은 수년간의 연마를 거친 노력의 집약적 소산이다. 박그림은 어렸을 적 도제식으로 탱화 제작 방식을 학습하며 기법 연구에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법뿐 아니라 화면을 구성해 나가는 방식 또한 자연스레 학습하였고, 이후 중생 교화가 목적인 불화에서 나타나는 알레고리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깨달음의 과정에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작업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부처의 통찰력이 느껴지는 눈빛과 수인을 비롯한 자세, 치밀하고 촘촘하게 묘사된 보살들의 사라, 화려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장신구와 의복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그려진 것이 없으며, 모든 도상은 철저한 계산하에 그의 화폭에 자리를 잡고 스며든다.


관계에 의한 상처, 깨달음, 극복의 과정_〈화랑도〉(2015-2018), 〈심호도(尋虎圖)〉(2018- ) 시리즈 

그렇다면 박그림은 어떠한 내용을 화면에 담았을까.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그림은 불화의 형태을 차용하고 있으나 특정한 교리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경험에 기인한다. 창작의 개념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2015년부터 이번 전시에 출품한 신작에 이르기까지 그는 오로지 한 가지의 주제에 천착해 왔다.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맺어온 여러 관계와 그로부터 발생한 상처, 그리고 극복과 깨달음에 이르는 긴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에서 만난 (일부는 인연이라고 표현할) 주위 인물들과의 관계가 작품의 시작이 된다. 그가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 모든 작업의 출발점으로 〈화랑도〉(2015-2022) 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SNS에서 수려한 외모를 뽐내는 성소수자들의 셀피를 초상화의 형태로 그려낸 연작이다. 온라인 사회에 '나'라는 개인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남성들의 모습은 작가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시기의 대상이었다. 이미 사회적 소수로 분류 '당해' 버린 성소수자들 사이에서조차 서로를 외모에 의해 판단하고 분류하는 문화를 목격한 경험은 작가에게 일종의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이후 셀피와 실제 모습 간의 괴리를 목격하는 등 일련의 에피소드를 겪으며 또 다른 깨달음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고민은 이후 〈심호도(尋虎圖)〉(2018- ) 연작으로 이어진다. 불교에서 교육의 목적으로 그려지던 '심우도(尋牛圖)'를 차용한 작품이다. '심우도'는 내면의 본심(불심)을 찾아가는 과정을 야생의 소를 길들이는 동자의 모습에 빗대어 표현한 불화인데, 작가는 소를 호랑이로 바꾸어 '심호도'라 칭하며 본인만의 독자적 양식으로 발전시킨다. 동양에서는 주로 호랑이를 영물로 여기지만, 박그림은 단군신화 속 인간이 되지 못한 호랑이의 역할에 주목한다. 미완, 미결의 존재적 특징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닮아 있다고 여긴 작가는 소 대신 호랑이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삶에서 맺은 여러 인연들을 보살의 형태로 화면에 등장시킴으로써 인간관계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극복을 넘어 초연(超然)하기_〈Bel Ami〉(2020-2024), 〈XOXO〉(2024) 시리즈

 

성소수자로서 타인과의 관계 맺기는 박그림의 최근 작업 〈Bel Ami〉(2020-2024)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작품의 제목인 'Bel Ami'는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남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임과 동시에 퀴어 포르노물 제작사의 이름이다. 작가는 퀴어 정체성을 가진 주변 인물들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육체적 접촉이 선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러한 상황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을 화폭에 무작위로 뒤엉켜 표현하거나 적나라하게 클로즈업하여 묘사하였다. 작가는 정신적 관계보다 일회성이 짙은 육체적 관계로 귀결되는 상황에 피로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의 이미지 위로 반짝이는 섬광이 눈에 띄는데, 이는 작가가 표면에 반복적인 스크래치를 내어 벗겨내는 행위를 통해 그 자국이 마치 화면 속 인물들을 빛나게 보이는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속보다 겉이 중시되고 가벼움이 만연한 관계 맺기 싸움에서 켜켜이 쌓인 상처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이번 전시에 새롭게 선보인 신작 〈XOXO〉(2024) 시리즈는 〈Bel Ami〉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나 보다 과감하고 대담하게, 직설적으로 육체적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일회성을 띠던 관계들과 그로 인한 상처까지 작가는 이제 아득히 느껴진다고 말한다. 소모적 인연에 대한 권태와 싫증이 결국 욕망을 상쇄하기에 이른다. 때문에 오히려 적나라하게 현실을 마주하며 화폭에 숨김없이 묘사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박그림은 자전적 이야기를 끊임없이 작품에 녹여 내는 방식으로 퀴어적 정체성을 비롯하여 이면에 존재하는 관계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상처와 치유, 깨달음의 과정을 반복한다. 창작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논하고 전하는 모든 활동은 스스로의 내면을 두들기며 견고히 다잡는 성찰과 수행이자, 여전히 '다름'을 '틀림'으로 치부하는 세상에 던지는 나지막한 경고이다.


조현익 - 미술로 삶 섬기기 

조현익이 평범한 하루 속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과 감정은 작품의 재료가 된다. 필멸자인 인간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이기에, 그 소중함을 숭고의 차원에서 다루며 숭배의 대상으로 신격화하기에 이른다. 누군가는 신을 섬기듯, 작가는 미술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창작은 그에게 곧 제의적 행위이다.

그는 작업 앞에서 어느 때보다 솔직하고 진지하며 치장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삶의 모양과 발맞추어 작품의 형태 또한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다. 캔버스 회화부터 4m가 넘는 대형 철판 작업까지, 형식과 매체의 사용에 있어서도 자유롭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작품을 통해 '성(聖)과 속(俗)', '성(聖)과 성(性)'의 상반된 개념들 간 경계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모두 우리의 일상에 녹아 있으며 삶을 이루는 필수적인 속성이라는 점에서 조현익이 충분히 매력을 느낄만한 요소들이다.


사랑, 실연, 욕망의 제단_〈빛, 나를 베다(Flash-S-101988)〉(2010), 〈빛의 탑(Flash-I-1313145)〉 (2012-2024) 

2000년대 초반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현익은 쉼 없이 작업 활동을 지속하였으며, 20년이 넘는 세월만큼이나 작품 또한 여러 형태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그의 작업적 공통분모는 바로 삶이 곧 그가 섬기는 대상이자 종교라는 지점이다. 2010년 〈빛, 나를 베다(Flash-S-101988)〉를 제작할 시점에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연애와 그에 따른 감정들이었다. 첫사랑이 언제나 아린 기억으로 남듯 인간이 타인과 나누는 사랑에는 모두 나름의 입장이 있고, 추억이 있으며, 아픔이 있다.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나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하며 후회했다. 상처는 창작의 자양분이 되어 어두운 심연의 깊이를 담은 철판에 거친 스크래치를 내고, 강렬한 획을 그어 지나간 연인의 초상을 그려냈다. 또한 수십 개의 촛불로 이루어진 철제 탑인 〈빛의 탑(Flash-I-1313145)〉(2012-2024)을 세우고 쇠사슬을 공중에 매달아 광적인 의례 현장을 연상케 하는 제단의 모습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의식에 바친 제물은 다름 아닌 작가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개인적 사원을 세우다_〈사원(私院)〉(2014-2024) 

구체적인 제단의 형태를 갖춘 작업으로는 2014년 처음 제작되고 이번 전시에서 개작된 〈사원(私院)〉이 있다.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형태의 '부모불(父母佛)'을 차용하여 황동판에 그려낸 〈신앙〉(2014) 작품을 중심으로, 주위에 놓인 선반과 테이블에 성물을 연상하게 하는 오브제들과 여성의 성기 모양을 연상시키는 조각, 춘화첩 등을 뒤섞어 구축한 지극히 개인적인(私) 사원이다. 남녀의 합일을 자비와 지혜가 일체화된 경지로 바라보는 티베트 밀교의 '부모불'에서 조현익은 ‘성(聖)'과 '성(性)'의 공존을 보았다. 종교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성(聖)’과 ‘속(俗)’의 특징을 동시에 드러내어 양가적 속성들의 정의는 한 끗 차이임을 설파한다.


자녀의 신격화_〈믿음의 도리-탄생〉(2015), 〈믿음의 도리: 엄마와 나-기도〉(2016) 

이후 출산이라는 인생의 거대한 변곡점을 만나면서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종교화의 기운은 한층 더 강력해진다. 여전히 무거운 철판 위에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으나, 그 대상은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녀들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황동판에 100일을 맞은 아들의 모습을 그려낸 〈믿음의 도리-탄생〉(2015)은 마치 우뚝 솟은 성상을 올려다보는 듯한 압도감과 아우라가 느껴지도록 제작하였다. 그 앞에서 〈믿음의 도리: 엄마와 나-기도〉(2016)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놋그릇이 공중에 매달린 수저와 부딪히며 사찰의 풍경과 같은 청아한 소리를 낸다. 그 의미는 명료하다. 아들이 밥 '잘' 먹고 '잘' 살수 있도록, 100일의 아기를 위해 마련한 아빠의 의식이다.


본격적 성화 만들기_〈이콘〉, 〈네오 이콘〉(2020- ) 프로젝트 

육아의 과정은 일상의 성스러운 순간을 기리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키워, 보다 직접적으로 성화 형식의 작업을 등장시킨다. 2020년부터 최근까지는 〈이콘〉, 〈네오 이콘〉 프로젝트를 통해 자녀의 성장으로부터 얻은 경험과 감정을 작품에 고스란히 녹여 낸다. 언어를 처음 배운 아이의 귀여운 말실수나 아빠를 위해 정성껏 차려낸 소꿉놀이 밥상 등을 화폭에 옮겨내는 형태로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시기와 순수한 유아적 시각의 숭고함을 기린다.

밤낮없이 육아에 온 힘을 쏟았으나 때때로 죄인이 되는 경험을 한다. 故권정생 선생의 『엄마 까투리』 동화가 단초가 되었다. 어미 꿩의 처절한 희생을 담은 내용으로, 작가의 성찰을 일깨웠다. ‘나는 과연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을까?’ 자문하다 보니, 아이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이 순교자의 태도와 유사하다는 결론에 닿는다. 올바른 부모의 도리,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네오 이콘: 엄마까투리〉(2022) 작품에 담아내었다.

 

〈네오 이콘: 가족사진-어느 할로윈 데이〉(2024)처럼 기독교의 성화 형태를 보다 적극적으로 차용한 작품들도 제작한다. 슬리퍼 차림의 편한 복장으로 핼러윈 데이 파티를 즐기는 네 식구의 모습 뒤로 초월적 존재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원형 광배가 눈에 띈다. 한없이 평범한 가정이 보낸 하루이지만 조현익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신성한 순간이다. 금빛 벽지를 콜라주 하는 형태로 후광을 표현하였다. 빛 반사를 극대화하여 반짝임을 강조한 그의 재치가 화폭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을 더욱 영롱하게 빛낸다.

 

때때로 야속한 사회가 나의 최선에 반하는 상황을 들이밀며 우연하고도 무해한 죄인으로 만들지만, 언제나 스스로의 삶을 살아내며 숭배해온 조현익에게 창작은 여전히 생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선명히 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는 오늘도 묵묵히 그림을 그리며 그의 도리를 다 하고 있다.

[보도자료용 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사회가 정립한 제도와 이분법적 사고는 결코 복잡한 인생의 모든 타선을 아우르지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세상이 만들어낸 기준과 타인의 잣대에 의해 우리는 누구나 무해한 죄인이 될 때를 경험한다.

이번 이인전에서는 개인적인 서사를 종교화의 형식에 담아 풀어내는 박그림, 조현익의 작품을 동시에 조망하며 창작 행위를 통해 생의 방향을 확인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실현하는 두 작가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들여다본다.

전시의 제목인 『잘 살고 있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도 하며』는 조현익 작가의 2016년 작가노트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어느 날 '믿음의 도리'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포교용 전단을 받은 그는 '믿음'과 '도리'라는 단어가 갖는 '책임과 강제', '포용과 폭력'의 상반된 개념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믿음이 없는 자, 혹은 도리를 다 하지 못한 자, 결국 '죄인'이 되어버리는 세상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믿음과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것인가.

이번 전시의 출품작에서 그 해답을 엿본다. 겉보기에는 다른 위치와 방향으로 보이는 박그림, 조현익의 삶과 작품도 같이 보니 분명 통하는 면이 있다.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나와 내 인생을 섬긴다.

박그림은 불화의 형식을 차용하여 퀴어 문화를 드러낸다. 그의 「심호도(尋虎圖)」 연작은 불교에서 소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내용의 종교화 '심우도'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소 대신 자신을 대입한 호랑이가 등장한다. 단군신화 속 미완의 존재인 호랑이를 성소수자인 본인의 정체성과 연계하여, 인간관계로부터 얻은 상처와 극복을 담아내었다.

반면 조현익은 성화 형태를 빌린다. 그의 「이콘」, 「네오 이콘」 프로젝트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화면 중앙에 위치한 성상과 머리 뒤 금빛 광배가 특징인 기독교의 이콘을 본떠 제작한 연작으로, 일상 속의 순간들을 화폭에 담아내어 비종교적 대상에서 느낄 수 있는 성스러움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가족과 육아의 풍경, 즉 평범한 하루의 기념비적 측면과 숭고함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티 한 점 없이 수려하고 매끈한 필선과 잔잔한 호수에 비친 달빛을 연상시키는 곱고 나지막한 색채를 사용하는 박그림, 유화 물감 냄새 짙게 배어 있는 정통 캔버스 회화부터 4m가 넘는 대형 철판 작업까지 재료와 크기에 구애받지 않는 과감하고 터프한 작업을 선보이는 조현익 작품의 공통분모 속 보이는 형태의 차이 또한 흥미롭다.

 

그러나 결국 두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큰 핵심은, 그들에게 창작은 각자의 삶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선명하게 하는 수행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넓은 세상의 수많은 인생 중 하나뿐인 나의 삶. 결국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방법 아닐까.

다양성에 대한 용인의 역치를 넓혀주는 것이 미술의 주요한 역할임을 상기해 볼 때, 두 작가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의 삶과 자유, 선택의 권리, 사회의 다원화를 인정하는 태도를 일깨운다. 생의 스펙트럼을 존중하는 두 작가의 작품이 나의 하루를, 삶 전체를 회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정유연 OCI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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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사회가 정립한 제도와 이분법적 사고, 흑백논리는 복잡한 인간사의 모든 타선을 아우르지 못한다. 내 인생은 나의 신념대로 '잘'만 굴러가고 있는데 세상의 규범에, 타인의 잣대에 의해 무해한 죄인이 될 때가 있다. 그저 기준을 따르지 않았다고 틀린 삶인 것인가. 때로는 굳건하다 믿었던 나의 신념도 흔들릴 때가 있다.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지는 순간, 우리는 기도한다. 사람의 영역이 아닌 초자연적인 무언가. 즉 종교와 신앙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얼핏 낯선 조합인 듯 보이는 박그림, 조현익의 작품과 삶도 같이 보니 분명 통하는 면이 있다.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나와 내 인생을 섬긴다. 불화의 형식과 불교 교리를 차용하여 성소수자의 정체성과 현대 사회 속 퀴어 문화를 드러내는 박그림, 종교적 성상과 기독교의 성화 형태를 빌어 평범한 일상에서의 기념비적 측면과 숭고한 의미를 찾아 나가는 조현익에게 작업 활동은 제의적 행위와도 같다. 창작은 그들의 신념을 선명하게 하는 수행이다.

 

결국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방법 아닐까. 다양성에 대한 용인의 역치를 넓혀주는 것이 미술의 주요한 역할임을 상기해 볼 때, 두 작가의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생의 스펙트럼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일깨운다.

정유연 OCI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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